라이프로그


크리스마스 트리에 무얼 다나 by mori

바쁠수록 이글루스에 더 자주 들어오고... 이러다가 그냥 망하는 게 아닐까하는 느낌적인 느낌.

라틴어 단어 정리하다가 갑자기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혼자서 도서관에서 큭큭대다가 몇 자 적는다.



지도교수는, 내가 알기론 부모님들은 그리스도교 신자였고(가톨릭인지 개신교인지 모른다)

자신은 교회 초큼 다니다가 말았고 종교도 없지만 일단 악마의 존재나 귀신의 존재는 믿는다(읭?).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초대 그리스도교 교부들도 좋아하고 중세 주술사책을 번역할 정도로 덕후스럽다.

나도 교회에 다니긴 하지만 사실 너무 복음주의적인 사람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딱 지금 지도교수 정도가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라틴어 강독 시간에 빵 터진 사건이 있었다.

그날도 성녀 힐데가르트의 글을 함께 읽고 있었고, 힐데가르트가 신의 입을 빌어서 점성술 하는 애들을 호통치는 부분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교도(?)들의 주술에 대한 부분도 나오기 시작했다.

지도교수가 사실 그리스도교의 진짜(?) 의례들을 유럽의 토속 신앙 같은 것들과 완전히 구분하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크리스마스 트리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크리스마스도 예수가 진짜 태어난 날도 아니고 기존의 축제일에 덧붙여진 행사인데

트리 조차 원래 있었던 게 아니라 기존의 의례같은 걸 사용한 것이라는 대화가 이어졌는데(자세한 내용은 나도 잘 몰라 생략)

지도교수가 자기 애들 키울 때 복음주의 그리스도교인으로 키우지 않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를 듣다가 완전 빵 터진 것이다.

첫째는 다행히 무신론자로 태어나서(?) 자기가 별 신경을 안 쓰고 키웠는데

둘째는 이상하게 어렸을 때부터 교회도 나가고 하필이면 학교도 미션스쿨이었고 주변 이웃들도 그리스도교인들이었고해서

지도교수가 걱정을 했단다. 둘째가 복음주의 그리스도교인이 될까봐.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야하나 걱정이 된거다.

크리스마스를 안 챙기자니, 

주변에 다 챙기고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이미 전통이 되어버렸는데 자기집만 안 챙기자니 애들한테 안 좋을 것 같고

크리스마스를 챙기자니,

너무 그리스도교 중심적이고 다종교주의적이지가 않고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해결책을 냈다는 게,

크리스마스도 챙기고 크리스마스 트리도 꾸미는 대신에

트리에다가 early mammals 그러니까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포유류를 단 거다.

...네?

그때 웃느라고 제대로 못 물어봤는데, 그럼 매머드 같은 인형을 구해서 단 건가?

...매머드?

교수의 노력이 성공했는지 어쨌는지 그리하여 지도교수의 둘째딸도 복음주의 그리스도교인이 안 되었다는 훈훈한 마무리

...인가?

어쨌든 그 때 웃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선배 하나가 다음날 내 도서관 자리로 찾아오더니

어제 그 얘기 듣고 자기는 좀 이상하게 느꼈네 말았네 이런 얘기를 해서,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었나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는 결말.

걔가 그리스도교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어쩌면 내가 수업시간에 교회 다닌다고 말한 걸 기억해서 내가 상처받았을까봐(?) 걱정해서 그 얘기를 다시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음 난 그냥 재밌었다. 지도교수, 너무 웃겨.

어제는 라틴어 자료 중에 염소 얘기가 나오니까 혼자 염소 흉내내면서 번역을 하던데.

성격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교회자료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지도 않고 편견을 가지지도 않은 점이 맘에 든다.

마무리는 얼마 전에 혼자 바닷가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으로 마무리.






덧글

  • Esperos 2013/02/18 14:31 # 답글

    중세 주술사 책이라! 그네들이 뭐라고 적어놓았는지 몰라도 의례에 호기심을 갖다 보니 뭐라고 써 놓았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그런데 라틴어는 제대로 읽을 만큼 알지 못하고, 영어 번역본을 읽는다면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안 나오는 문어체적인 단어와 씨름해야 되고 -.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읽을 만큼의 가치를 느끼지는 못해서 참말로 계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라틴 고전도 제대로 안 나오는 판이니 그런 중세 서적이 번역돼 나오기란 아직도 요원하죠. 미국 세일럼 재판에 관한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안 읽고 놔두고 있네요 (먼 하늘)

    지도교수가 참 어렵게도 했군요. 그냥 별 안 달고 천사 장식 같은 거 안 달면 그만인 것을. 예전에 핀란드에 갔을 때 어느 노부부 댁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요, 크리스마스 트리로 전나무에 진짜로 양초를 붙여놓은 거 보고 완전 깜놀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할머니가 워낙 촛불을 좋아하셔서, 할아버지가 잘못하면 불난다고 싫어하는데도 (그 문제로 젊으셨을 때 많이 싸웠다는군요 ^^; ) 그것만큼은 고집을 부린다고 하셨죠.
  • mori 2013/02/18 11:40 #

    할머니 멋져요!!! 우와 진짜 양초라니!!

    안 그래도 지도교수가 John of Morigny라는 중세 수사가 쓴 Liber Visionum을 십수년간 공동번역해서 얼마 전에 탈고했더라구요. 중세 주술을 꽤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더라고 하던데 혹 출판 후 지도교수가 한 권 주면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여기선 지도학생이라고 자기 책 그냥 주고 이런 훈훈한(?) 정이 없어서 ㅠ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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