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컨퍼런스 후기 by mori

개인기록용으로 남기는 글. 미국에서 두 번째로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하고 남기는 후기 및 반성문(?). 어짜피 일기장에 써도 안 볼게 뻔하니, 차라리 블로그에. 와인을 마시며, <스케치북>을 보며 편하게, 그러나 불편한 마음으로 쓰는 글.



주제는 황 데레사(Theresa Hwang)으로 알려진, 한국 가톨릭의 이단으로 규정된 여성이 고통을 느끼고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작년 수업시간에 발표하고 기말 페이퍼를 작성했던 바 있는데 지도교수가 매우 좋아했고 같이 들었던 수업에서도 반응이 좋았던 듯. 그래서 AAR에 한 번 프로포절을 냈다가 거절(?)당하고 이번 Southwest Regional AAR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명상과 동양종교 파트에Contemplative and Asian Religion 섹션에. 원래 여기에서 발표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무난하게 그리스도교Christianity 섹션에 프로포절을 내려고 했다. 그런데 역시 이단을 다룬다는 무게감 때문인지, 명상과 동양종교 파트를 같은 학교 다니는 친구가 맡는다는 이로움 때문인지 지도교수가 여기에 프로포절을 낼 것은 적극 추천했고 나도 망설임없이 이 곳에 냈다. 일단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 일단 준비가 미흡했다. 이번주에 너무 바빴던 관계로 파이널 페이퍼를 대충 분량에 맞춰서 편집하는 수준으로만 발표문을 썼는데, 그 정도로는 부족했고 완성된 글이 아니었다.

-발표 연습을 충분히 하지 못해서 시간이 오버되었다.

-사실 시간이 오버된 것은, 처음에 랩탑과 프로젝터 세팅을 못해서인 것도 있다. 이 컨퍼런스에서 파워포인트를 쓸 경우 자기가 장비를 가져와야 한대서 너무 나이브하게 랩탑만 가져갔으나, 사실 프로젝터까지 가져오란 거였어;; 아니 프로젝터도 없다면 아예 테크놀로지를 못 쓴다고 하지;; 그래서 파워포인트를 못 쓴다고 생각해서 매우 당황했는데 앞의 발표자가 자기 프로젝터를 가져온 것을 보고, 내 발표 직전에 세팅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파워포인트를 쓸 거면 시설이 어던 상태인지 확인을 하고, 여전히 쓸 거면 학교에서 프로젝터를 빌려갈 것.

-사실 당황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컨퍼런스에 도착해보니 발표자 리스트에 내가 없었던 것...? 내가 프로포절을 내서 심지어 발표를 하도록 확인도 받았는데 발표순서에 내가 없어! 내 발표도 없어! 나는 어디에도 없어! 알고보니 내가 프로포절을 냈던 친구가 실수를 해서 내 이름과 요약본을 아예 빠뜨린 것. 이 컨퍼런스 자체도 매우 잘 준비된 것은 아니었고 내가 아무리 등록 데스크에 가서 얘기를 해도 이 사람은 모른다고 하고. 어쩔 수 없이 그냥 숙소로 돌아와 발표 연습을 하는데,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울컥하는 거다. 내가 발표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발표 연습을 해서 무엇하랴, 이런 생각? 하여튼 원래 섹션을 맡았던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그 친구가 다른 담당자들에게 이메일을 돌려서 토론시간에 겨우 발표를 하기는 했는데 내가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보다. 발표 중간부터 머리가 아프고 식은땀이 나서, 내가 쓸데없이 너무 긴장했나보다고 날 탓했는데 발표 후에 숙소로 돌아오니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어. 시야 왼쪽 아래에 계속 노이즈가 보여. 친구 얼굴을 보면 입술이나 코가 안 보여. 예전에 겪었던 편두통과 비교하면 뭐 별거 아니지만, 그냥 이런 사태가 있게 하면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미리 스케쥴을 체크할 걸, 그냥 이메일로 받은 것만 보고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냥 그리스도교 섹션에서 발표할 걸 그랬다. 아니, 사실 어디가 나을지 모르겠다. 내가 연구하는 주된 분야인 중세 그리스도교야 물론이고 어제 발표한 내용도 명상과 직접 관계되었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른 발표자들은 주로 동양 종교 즉 불교나 도교의 명상 전통이나 이런 명상을 어떻게 미국 학교에서 가르칠 것이냐가 주된 관심사야. 관심사 자체가 다른 것은 문제가 아닌데,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해 반감 같은 걸 갖고 있나보다. 하긴 그랬으니 동양종교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하겠지 ㅠㅠㅠㅠㅠㅠ 물론 이걸 드러내진 않았다. 아니, 그렇다해도 난 억울해효! 내가 연구하는 주제는 개신교, 혹은 가톨릭 주류에서도 많이 벗어난 주제란 말이효! ㅠㅠㅠㅠㅠㅠ

-고통에 종교적 의미를 덧붙이는 과정을 발표하다보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저거 그냥 정당화justification가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 게 사실 중요한 문제인데, 예전에 너무 생각을 열심히 하다가 내 나름대로 답을 찾고는 오랫동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던 게 문제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지라 저 질문을 받았을 때는 멍했다. 내가 좀 더 세심하게 양편, 고통의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세밀하게 다루지 않았다. 적어도, 고통의 부정적인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쯤은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이 걸 너무 간과하다보니 내 의도와는 다르게 발표가 안티페미니즘,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것처럼 되어버렸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논문을 쓸 거면 어떤 식으로 세일즈(?)를 할 것인지가 중요하긴 할 것 같다. 사실 주제 자체에 대해 회의가 들었는데, 그냥 내가 썰을 잘 풀지 못했다고 생각하련다. 어제는 너무 우울했고, 슬펐고, 화가 났고, 여러가지 마음이 들었는데 거기까지 나갈 것은 아니었고 굳이 발표까지 끝냈는데 계속 괴로워하는 것도 웃기고. 집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빨래를 개고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와인을 따니, 그리고 이 글을 쓰니 기분이 좀 낫다. 역시 노동 뒤엔 와인이여! 역시 기승전술...



덧글

  • Esperos 2013/03/11 16:36 # 답글

    황 데레사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천주교 신자들도 나주 윤 율리아에 묻혀서 잘 못 듣는 이름인데, 어떻게 황 데레사까지 아셨군요! 그것도 꽤나 오래 전에 나왔는데 말이죠. 황 데레사에 대해선 아무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디씨식으로 '정신승리' 혹은 Q라고 부르는 게 결국 정당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유명한 인지부조화 보고 사례도 이미 있고.

    발표 준비만 해도 XX 같은데 외적인 문제로 삐끄덕대면 정말 X 같죠. 그 기분 압니다 (____) 발표회장에서 겪은 일은 아니지만요. 수고하셨습니다.
  • mori 2013/03/12 01:58 #

    앗 감사합니다. 사실 황 데레사는 방선생님께 논문도 소개해주시고 책도 구해주셔서 페이퍼를 쓸 수 있었어요! 디씨에서는 Q라고 하는군요! 어쨌든 정당화라고 보기엔 너무 슬프죠(응?)

    흐흐 많이 배웠다고 '정신승리'하려고요. 감사합니다!
  • Esperos 2013/03/12 03:09 #

    방 선생님이라면 서울대 방원일 박사님인가요? 그분이 도와주셨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 방 박사님의 박사 학위 논문도 꽤나 재미있었죠 남이 애써 만든 논문이 저 같은 외부인 눈에는 그냥 '재미난 읽을 거리'이니,. 이공계 논문도 그렇고, 논문이라는 글 자체가 운명이 참 슬픈(?) 놈이죠.

    사진에 있는 포도주 잔을 보니 술 생각이 간절하네요. 저도 꽤나 포도주를 좋아하는데 못 마신 지 1년이 다 되어갑니다 ;ㅅ; 좋은 술에 좋은 안주에 재미난 수다는 참 좋죠. 좋은 줄 알면서도 지갑 사정을 헤아려서 소주 마시는 때가 많은 거 보면 나이가 들면 어쩔 수가 없구나 싶어요 (____)

    덧말: Q라는 게 디씨 역사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역사 덕후들 사이에서 한 때 유행했던 말입니다 (____)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서 따와서 뭐든지 자기 좋은 쪽으로 정신승리하는 사람을 비꼬는 의미로요. 그쪽 덕후들 사이에서만 잠깐 유행했던 말이죠 (___) .
  • mori 2013/03/12 03:55 #

    네 그 분이 맞습니다. 워낙 도움을 많이 받아서 감사+죄송하다는 ㅋㅋ

    혹시 한국에서 뵐 기회가 있으면 와인 함께 해요 꺅꺅 ㅋㅋㅋ 차지 안붙는 식당으로 가서 마셔도 될 듯! 미쿡이 포도주랑 맥주는 싸서 그건 참 좋아요. 저는 꼭 세일하는 걸로 골라서 15불 내외로 삽니다. 다행히 제가 포도주에 대해 잘 몰라서 그냥 막 마셔요. 저 와인도 decoy인데 샤도네가 유명한 걸 피노 누아로 사서 마셨습니다, 세일하길래 ㅎㅎ

    아Q정전에서 나온 거군요. ㅎㅎ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웬지 마음이 찡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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