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필경사의 마음이 되어! by mori

라고는 썼지만... 그냥 처음으로 중세 문헌을 (셀로판지를 사이에 두고) 만져보고 처음으로 필사해 본 얘기.

영국 잠깐, 프랑스 좀 더 다닐 여행을 앞두고 두근두근...하기는 커녕 이 여행을 헛되게 노는 데(와 먹고 마시는 데)에만 쓰지 않기 위해 도서관에 들를 생각에 매우 걱정이 태산 같.. 무슨 문헌을 볼지도 정하지도 않았;; 이러다가 논문 쓸 때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가 이렇게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자, 지도교수는 이미 이 여행이 사실은 공부를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다. 하지만 착한 지도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도서관에 가서 중세 문헌을 찾고 필사하는 방법을 시전해주기로 했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도서관이 정말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나름 중세 문헌의 낱장들이 보관되어 있는 Woodson Research Center가 있는데, 거기에서 문헌 다루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고문헌자료실은 미리 교수가 예약을 했고, 정해진 시간에 가니 사서가 요청한 자료를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다. 가방을 사물함에 넣어야했지만 카메라랑 랩탑이랑 필기도구는 모두 소지 가능. 지도교수에 따르면 도서관마다 지켜야하는 룰이 다르니 이걸 꼭 체크해야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지금 한 명 영국에 가 있는데 영국박물관 같은 경우 개인이 카메라로 문서를 찍는 게 금지되어있고 인터넷을 쓸래도 엄청엄청엄청 느리기 때문에 거의 쓰질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노트와 연필이 필수라는 것이지. 

그니까 내가 할 자료연구라는 건, 내 논문과 관계될 것 같은 문서가 이 도서관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예약을 해서 문헌을 요청하고, 직접 가서 문헌을 보고 조금이라도 내 논문과 관계될 것 같으면 닥치는 대로 필사를 하고, 사진 찍는 게 허용이 되면 사진을 찍고, 숙소에 돌아와 그 필사본을 갖고 번역을 해보고 그 자료에 대해 검색을 해보고, 정말 내 논문에 필요한 내용이다 싶으면 그 도서관에 가서 사진을 구입하는 거다. 

디지털화된 자료 같으면 내가 그냥 검색해서 도서관 홈페이지 가서 사진을 내려받으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진들은 역시 사진이기 때문에 중요할 수도 있는 작은 낙서나 정보가 누락되어 있을 수도 있고, 색감 같은 게 다를 수도 있고, 문헌의 실제 크기나 일러스트레이션의 크기 같은 게 직접 보지 않으면 와닿지 않는다고. 그래서 디지털화된 자료도 필요한 자료면 꼭 직접 가서 필사를 하라고 그랬다.

우리가 같이 본 자료는 중세의 찬송가 자료. 얼마 전에 학교 사학과 학생이 연대와 필경사 이름을 알아내어 유명해진 문서이다.

으음 너무 작긴 하지만 멀티미디어를 연결할 수가 없네예... 출처는 이 곳. http://scholarship.rice.edu/handle/1911/27619

거의 내 책상만한 문서였는데 당시의 찬송가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고 찬송을 불러야하므로 크게 만들었다는 지도교수의 설명. 사진은 너무 작아서 안 보이지만;; 저 바깥 테두리에 금테가 둘러져있는데, 지도교수가 오래된 문서에서 이게 이 정도 남아있으면 매우 멀쩡한 편이라고. 문서를 한 7~8장씩 본 것 같다. 우리가 본 것들은 다행하게도 비닐로 씌여져 있어서 보기가 쉬웠는데, 다른 도서관에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으니 흰장갑을 준비하고 되도록 문서를 만지지 않게 조심해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필사 연습을 해보았는데, 내가 20분동안 한 쪽을 옮기느라(번역도 아니고!) 낑낑댈 때에 지도교수는 두 쪽 다 옮김;; 게다가 난 엄청 틀렸어;; d랑 o랑 s랑 r이랑 다다다 헷갈려! ㅠㅠㅠㅠ 나 칼리그라피 배워야하려나봐... 내가 이래서 만년필에 요즘 혹하나보다 ㅠㅠㅠㅠㅠ 제일 어려운 것은 약어였는데 a 하나 덩그라니 써있고, v 써있고 이러면 이게 뭥미? 다행히 지도교수가 라틴어 약어 목록 싸이트를 알려주었다. http://www.hist.msu.ru/Departments/Medieval/Cappelli/ 연습해야할 것 같다. 가기 전까지. 번역은 고사하고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

얻어야할 정보도 많고 좀 긴장을 했던 시간이었지만, 정말이지 너무 행복했다. 그냥 공부하느라 많이 지틸 때 이런 순간들이 적어도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있어줘야 하는 것 같다. 나는 공부에 막막막 희열을 느끼고 그러는 스타일이 아니라 환멸이 대부분이지마는;; 그냥 내가 믿는 바는 공부의 97%는 지옥이고 3%는 행복감인데 그냥 그 3%를 바라보고 하는 거라는 것. 그래, 어제가 나의 그 3%였다.

내가 중세를 연구하게 되리라는 건 정말 몰랐다. 학부때까지만 해도 영문학과, 혹은 심리학과를 주전공으로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보니 종교학과가 주전공이 되었고, 대학원은 영문학과나 심리학과 둘 중에 하나 가려고 했는데... 이하생략. 하지만 그 때는 기억난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영국에 머물렀을 때 부활절 휴일을 맞아 아일랜드에 혼자 여행간 적이 있었다. 더블린에서 트리니티 칼리지에 갔는데 그곳 도서관에 중세의 고문헌이 전시된 것을 보고 온 몸이 저릿해졌던 기억.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도서관을 걸어다니고 문헌을 구경하고... 그 기분이 젖어 칼리그라피 펜촉까지 구입했던;; 허허;; 그렇네;; 그 때 만년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구나;; 

물론 그 때는 제가 영문학과에 가서 중세를 공부하게 될 줄 알았;; 

어쨌든 고문헌, 이제 또 만나러 갑니다(웅?). 아래는 어제 처음으로 필사한 것. 많이 틀렸다;;









덧글

  • 파리13구 2013/07/21 09:50 # 답글

    중세사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중세적 기술을 체험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필경사 체험이라...^^
  • mori 2013/07/21 12:01 #

    앗 덕분에 "필사가"에서 "필경사"로 단어를 바꿉니다. ^^ 감사합니다. 근데 자꾸 만년필을 지를까봐 걱정이네요.. 후후...
  • 2013/07/22 09:5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7/22 14:5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