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호의에 기대는 삶 by mori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외국생활 이제 안 힘들지 않냐고? 만 5년을 향해 달려가는 외국 생활, 이제 적응하지 않았냐고 말이다. 하지만 생활의 어려움이야 내가 얼마나 적응했냐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 처음 왔을 때의 어려움이 있고, 몇 년 살았을 때의 어려움이 있고, 나중에 혹 이 사회에 완전히 편입하고 싶을 때의 어려움이 있기 마련.

외국 생활에서 느끼는, 나의 가장 큰 어려움은 타인의 호의에 기대야한다는 것이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서구식 사고방식은 배워야하고, 여기에 키가 작은 동양인 대학원생 여자가 결합되면 어쨌거나 다른 미국 원어민 대학원생 특히나 남자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된다. 이걸 뼈저리게 느낄 때가 내가 상대방의 호의에 기대야할 때.

외국어인 영어로 글을 썼을 때 나는 이걸 매끄러운 영어 표현으로 다듬을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원어민 친구에게 부탁을 해야한다. 이 친구가 내 부탁을 들어줄 지 말 지는 순전히 친구의 호의에 기대는 것이다. 얘는 나를 도와줄 의무가 없거든. 법적인 의무도 없고 도덕적인 의무도 없다. 그냥 거절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 하지만 얘의 에디팅에 의존해야하는 나는 매우 절박한 심정이지. 

이런 상황은 외국 생활에서 반복된다. 심지어 말하기 자체도 그래. 내가 영어 단어나 표현을 몰라서 쩔쩔맬때, 혹은 영어로 말하기가 서투를 때 상대방은 다른 원어민과 대화를 할 때보다 나랑 대화를 할 때 더 많이 집중해야하고 생각을 해야할 수 있다. 근데 그렇게 해주는 것 자체도 그 상대방의 호의에서 나오는 거다. 의무도 아니고. 여전히 종종 느끼는 거지만, 나의 미국 친구들은 착해서 내가 말하면 언제나 경청하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가끔 얘네들이 너무 피곤하거나 바쁠 때는 무시할 수도 있는거다. 이건 악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 호의가 없어서 그런거고. 그런 피드백을 받은 나는 물론 움츠러 들지만 얘를 비난할 수는 없다. 얘는 그럴 의무가 없거든.

이건 뭐 인간관계 뿐 아니라 학교 행정 같은 데에도 적응이 된다. 나는 외국인 유학생이고 학교에서는 사실 자국민 대학원생들에게 해주는 정도만 해줘도 된다. 나머지는 호의다. 학교의 눈에서 보자면 나 같이 영어가 서툴고 미국 학교 시스템에 잘 모르고 수업 방식에 낯설은 사람에게는 수업을 줄 필요가 사실 없다. 같은 돈, 같은 혜택을 준다면 나보다 더 능숙하게 수업을 할 수 있는 자국민 대학원생을 쓰면 되니까. 그 기준이 뭐였든지간에 정말 공정한(?) 방식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나 같은 외국인은 하위에 계속 머무를 거다. 

다른 미국인 친구들처럼 생활을 영위하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호의에 기대야한다. 막 미국에 왔을 때 다른 한국인 학생에게 불평했던 적이 있다. 왜 이 학교는 외국인 학생에게 글쓰는 걸 봐줄 원어민을 붙여주지 않나요? 나는 다른 학교에서 그렇게 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고, 우리 학교가 외국인 학생을 뽑았으면 그래도 책임감있게 도와줘야한다는 생각에서 저렇게 말한 거였는데, 그 학생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게 되물었다. 왜 학교가 외국인을 따로 도와줘야하는데? 

호의에 기대는 삶은 피곤하다. 상대방의 기분이 어떤지 상태가 어떤지를 살펴야하고 거절을 당할 위험을 언제나 감수해야하며 거절을 당했을 때조차 내 정신건강을 위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야한다. 나야 한낱 유학생으로서의 조그만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 거지만, 이 호의가 생존과 직결되는 사람들도 있다. 나만 해도 얼마 전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길을 걷고 있다가 어떤 남자가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걸 느낀 적이 있었다. 발소리로 남자인 걸 알았다. 이상한 변태-_-를 만나고 나서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그 길이 워낙 외져서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게다가 그 남자가 나보다 더 걸음이 빠른게 아닌가. 이 동네에서 내 친구가 성추행 당한 경험도 있고, 이미 거리에는 다른 사람 하나도 없고 이 상황에서 저 사람이 갑자기 나한테 해코지를 하면 어쩌지 막막 걱정이 되었다.

근데 그 남자분은 빠른 속도로, 그 골목에서 나와 가장 먼 거리에서 반대편 벽에 딱 붙어서 걸어가셨다. 가버리셨다. 느낌이지만, 그 사람이 내가 겁먹지 않도록 애썼다는 걸 알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 그 사람에게 정말 고마웠다. 나를 해치지 않아줘서. 그리고 내가 겁먹지 않도록 노력해줘서. 근데 동시에 그런 기분을 느끼는 나에게 황당했다. 나에게 해코지를 안 하는 것은 호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권리아닌가. 근데 왜 나는 고마워하고 그걸 호의라 인식해야하는가. 내가 저 상황에서 해코지를 당해도 이상할 거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근데 그 인식 나 혼자 만들어낸건가? 

호의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없애야 한다. 호의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근데 그건 사회에서 해줘야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야기가 의도적으로 삼천포로 빠지는데, 영국에서 장애인 봉사활동을 하면서 느낀 게 그거다. 장애인이 호의에 기대지 않아도 비장애인처럼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게 영국 복지제도가 추구하는 바였다. 내가 일했던 친구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고 평생 한 번 걸어본 적이 없는 장애인이었다. 이 친구가 타인의 호의에 기대지 않고도 원하는 목적지로 이동하고, 식사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공부를 만나고, 건강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내가 이 친구를 위해 고용된 이유였다. 세 명의 봉사자가 하루 24시간씩 돌아가며 일하고 얘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얘는, 물론 인간적으로야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가 있지만 사실 고맙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는 돈을 받고 고용된 것이고 얘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였으니까. 우리가 도와주는 건 우리가 호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고용되었기 때문에 그럴 의무가 있어서 하는 거였다.

얘가 택시를 타도 택시 운전자에게 호의를 기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영국의 모든 택시는 휠체어를 태울 수 있는 장치가 달려있다. 택시운전기사분이 낑띵대며 얘를 들어올리네 마네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화장실? 장애인들에게만 장애인 화장실을 쓸 수 있는 열쇠가 지급된다.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고, 오히려 더 편안하게 화장실을 이용할 수가 있다. 장애인 화장실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대부분의 화장실에서 장애인용을 따로 갖춰놓고 있었다. 심지어 임시 화장실을 만들때도. 심지어 거리의 턱조차 휠체어가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잘 굴러가도록 되어있다. 굳이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유모차 끌어본 사람은 알거다. 한국 보도가 얼마나 엉망인지. 턱이 너무 많고, 턱마다 유모차를 갖고 씨름을 해야한다. 내가 있었던 영국의 도시나 런던의 거리는 그래도 이 턱을 없앤 부분이 꼭 있어서 웬만한 경우에는 내 친구가 타인들 도움 없이도 혼자서 휠체어를 몰고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럼에도 내 친구가 요청하면 봉사자 중 한 명이 동행한다. 호의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말이 너무 길어지는데-_- 어쨌든 사회가 추구해야하는 건 따뜻한 사회도 아니고 타인의 호의가 넘치는 사회도 아니고, 이 호의가 호의가 아니게 되는 사회가 아닐까...라는 이상한 말로 글을 마무리하려니 이상하군. -_- 어쨌든, 호의에 기대는 삶은 너무 피곤하다. 그래,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 거다. 너무 피곤해. 

덧글

  • 키르난 2015/05/28 08:52 # 답글

    글 읽으면서 생각했는데 어떻게 보면 '내'가 받는 호의는 배려인거로군요. 하지만 그 배려에 기대어 사회적 시스템이 부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저 아이들은 부모가 없지만 옆집 할머니가 배려해서 잘 돌봐줄거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없다면 그 아이들이 부모의 부재를 가능한 덜 느끼도록 사회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너무 넘겨 짚은 걸까요=ㅁ=;
  • mori 2015/05/28 09:33 #

    엌ㅋㅋㅋㅋㅋㅋ 키르난님 우리 지도교수님 같아요! 제가 하고 싶던 말이 그거였나봅니다. 명쾌! 통쾌!
  • 트린드리야 2015/05/28 10:31 # 답글

    상시 정신에너지를 쓰고 계시는군요. ;;
  • mori 2015/05/28 11:06 #

    긴장을 늦출 수가 없어서 더 피곤해지는 것 같아요. 뭔가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더 적다는 느낌이 들구요~
  • 2015/05/28 12:1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5/28 23:2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PennyLane 2015/05/28 12:54 # 답글

    기부의 최종 목적은 기부가 필요없는 세상 만들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자비와 동정에 기대지 않는 시스템 구축이 복지국가의 최종 목표겠죠. 요즘 한국에서 유명인사들이 너도나도 기부하는 모습이 보기는 좋지만, 개인의 동정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건 아직도 사회 안전망이 불안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복지시설 봉사하는 봉사자들을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방식을 참 싫어합니다. 물론 순수한 봉사정신은 존중핮니다만, 그 봉사자들에게 ㅁ 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 시설은 어떻게 될까요. 동정에 근거한 봉사보단, 봉사자 없이도 충분히 유지될 수 있는 복지시스템 구축을 촉구하는 게 대중매체의 할 일이라 보거든요.
  • mori 2015/05/28 23:26 #

    제가 봉사활동 시작할 때만 해도 뭔가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어요.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이런 마음으로 갔는데 정작 가보니 저는 장애학생에게 고용된 형태였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느낌이더라구요. 처음에는 충격이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훨씬 바람직했던 것 같습니다. 영국에서 그 봉사시스템은 그래도 봉사자에게 비자, 숙식과 약간의 금전적인 보상을 해줬기 때문에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홍조 2015/05/28 22:17 # 답글

    삼천포로 빠져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최근에 제가 손과 다리를 다쳐서 이래저래 돌아다니는게 힘들어서 더 구런지 모르겠네요..ㅎㅎ
  • mori 2015/05/28 23:27 #

    삼천포였는지 아니면 원래 생각이 그거였는지 헷갈리는 거 봐서는, 삼천포를 쓰기 잘 했던 것 같습니다. 손과 다리를 다치셨다니 ㅠㅠㅠ 얼른 나으시길 빕니다!!
  • 2015/05/29 19:32 # 삭제 답글

    개개인의 호의도 있어야겠지만 사회적인 지원도 물론 있어야겠지요..
    저는 글을 읽으면서 mori님의 유학생활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국어가 아닌 이상.. 언어에 대한 한계가 어쩌면 외로움보다도 더 피부에 와닿는, 실질적인 부족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도 잘 이겨내시고 지금까지 하시는 모습을 보니 든든합니다. 계속 힘내시고 잘 마무리하시길 응원할게요 ^^
  • mori 2015/05/30 09:31 #

    감사합니다 율님!! 유학이든 봉사활동이든, 제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많은 것들이 실상은 주어진 것들이라는 걸 많이 깨달았던 것 같아요. 흐흐 율님 응원이 있으니 힘이 납니다, 감사해요!
  • 2015/06/11 00:4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6/13 04: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6/12 11: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6/13 04: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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