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학풍이란 게 있긴 있는 걸까 by mori

학풍이라고 하니 너무 거창하긴 한데, 바로 앞의 글을 쓰면서 제프, 그러니까 성애와 종교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힌두교의 유명한 구루와 동성애를 관련짓는 연구를 썼다가 인도에서 책이 불태워지고, 가족을 위협하는 협박편지를 받고, 인도에 영원히 갈 수 없게 된 그 제프리 크라이팔이 오랜만에 생각나기도 해서, 아 나 성녀의 환시와 성욕에 대해 읽다가 너 생각났다고 메일을 간단하게 보냈다. 석사과정에서 너 책을 읽고 여기서 공부하게 된 게 생각났다고.

제프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런 계보(lineage)는 추적하기도, 헤아리기도 어려운 것이지만 너무 중요하다. 너는 선생으로 그걸 받고 넘겨주는 거다. 이건 전기회로 같은 거라고.

사실 나는 제프랑 연락 거의 안 한다. 수업을 한 번 들었고, 내 논자시 커미티였지만 그건 모두의 커미티였기 때문에 그랬던 거고. 내 친구 문제로 한 번 상의를 한 적이 있고, 한 번 만나서 길게 얘기를 한 적이 있지. 성모 마리아(?)에 대해. 그 후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제프는 너무 바쁘고, 자기 학생들 케어하는 데만도 엄청 바쁠 것이다. 얼마 전 학과 종강모임에서 만나긴 했는데, 그런 모임에서는 나는 제프를 보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실실 빠져서 친구들에게 대피한다 ㅋㅋ 그래도 그냥 내가 제프에게 이메일 보내서 도움을 요청하면, 바로 만날 약속을 잡고 내 얘기를 심각하게 들어줄 거란 그런 믿음이 있다. 

내 박사 논문에는 내가 다닌 학교의 교수들 이름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지도교수 이름이 들어있었는데, 그것도 라틴어 감수 봐줬다고 내가 주석에 달았는데 지도교수가 자기 이름도 빼버리라고 했다. 그런 감수는 자기도 자기 지도교수한테 받았던 거고, 너무 당연한 거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것 또한 어떤 종류의 믿음이긴 한데, 뭐랄까, 나도 그런 도움을 받았고, 나도 너에게 그런 도움을 주는 거고, 너도 누군가에게 그런 도움을 줄 거란 믿음 하에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들이었다.

논문 디펜스에서 나는 수정 없이 통과하긴 했지만 가장 신랄하게 내 커미티에게서 받았던 비판은, 너가 여기서 얼마나 배웠는데 왜 여기 교수들 이름이 없냐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논문은 여기가 아니었다면 쓰기가 힘든 그런 논문이었다. 이걸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서 써? 종교학과에서는 중세 신학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은 없다. 그렇다고 신학과에서 이런 논지를 받아줄 것인가? 여성학과에서 내가 이렇게 라틴어 번역에 목을 매는 것을 이해해줄까? 역사학과에서 내가 중세 역사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을 참아줄 것인가? 성애와 환시를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받아줄 곳은 여기밖에 없었고, 어떻게 보면 여기서 공부했기 때문에 내가 그쪽으로 더 연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논문에 제프의 이름은 들어가지 않지. 

졸업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분야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회의도 들고 걱정도 많이 든다. 어쨌든 나는 종교학에서 시작은 했는데, 지금 보는 논문이나 책의 대부분은 역사에 치중되어있다. 종교학의 이른과 관련된 책들은 본지 정말 오래 되었다. 이번 학기에 한 번 종교인류학 수업을 해주기로 했는데 와 나 종교인류학 논문을 본지 정말 오래됐다. 여성학 논문도 봐야하고 의학의 역사에 관한 책들도 본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 내 소개처럼 중세학자인가 싶기도 하다. 중세학에서 종교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논의의 가장 중심에 놓는 논문은 역사학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내가 신학자도 아니지 않나. 얼마 전 신학자를 뽑는 데가 있어서 지도교수한테 상담했는데, 결론은 우리는 신학자들을 연구하긴 하지만 신학자는 아니라는 거였다, 너무 당연하게도. 그냥 나는 여기저기서, "재밌는 공부 하는구나"란 얘기를 들을 팔자라는 생각이 드네.

또 한 번 잡마켓의 시기가 다가오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덧글

  • 2019/09/06 13: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9/07 00:2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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